양육가설 - 주디스 리치 해리스 독서일기

1998년 집필됐지만 아직 국내 번역 출간이 안 된 책인데, 누군가가 손수 번역해서 블로그에도 올려놓은 게 있어서 읽었다. 아마존으로 확인해 보니 페이퍼백으로 무려 480 페이지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가 주장하는 바는 뚜렷하다. 인간 아이가 백지나 찰흙으로 태어나고 부모의 양육을 통해 그 성격을 만들어간다는 기존의 '양육가설'은 실험 결과와 진화심리학의 맥락에서 볼 때 틀린 주장이고, (어른이 될) 아이의 성격은 많은 부분을 선천적으로 타고나고, 나머지를 채우는 '환경'은 부모의 양육이 아니라 아마도 또래집단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모는 학대를 통해 아이를 망칠 수는 있지만, 기본적인 것을 제공하고 나면 아이의 장기적인 성격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 딱 잘라 없다.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은 없지만, 논리적은 물론이고 경험적으로 이 주장이 옳다고 느낀다. 한 집의 아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더라도) 아이의 성격은 저마다 다르다. 나와 동생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방에 들어가 잠을 잤지만, 나는 같은 동화책을 몇 번씩 읽었고 동생은 온종일 숨바꼭질을 하고 다녔다. 부모님은 우리 둘을 똑같이 잘 양육하려 노력하셨겠지만, 반대로 우리 형제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에 부모님이 어쩔 수 없이 우리 둘을 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는 것도 명확하다.

타고난 기질이 성격으로 굳어가는 건 또래와 학교 생활에 의해서라는 것도 옳다고 느낀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에게 어떻게 보일까 엄청나게 신경을 쓴다. 내 성격이 곧 사회생활의 여러 국면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뜻한다면, 당연히 또래집단의 영향력이 제일 앞자리에 오는 것이 맞다. "노스페이스 사줘~ 애들은 다 입었단 말야~"부터 어떤 게 쿨한 것이고 어떤 게 쪽팔린 것인가 하는 가치관 형성까지. 무조건 무리의 평균과 똑같아진다는 게 아니라 '무리의 미감과 그 안에서의 어떤 포지션'이라는 애매한 무언가가 내 성격을 만들어왔고 생각한다.

그러니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해주고 나면, 그다음은 아이가 스스로 감당해 나가고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이한테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어떻게 자랄까 작은 일에 노심초사 할 필요도 없다.

어느 어머니가 주디스 해리스에게 항의한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니란 말인가요? 내가 내 아이에게 어떻게 대하든 아무 상관없단 말인가요?" 아마 한국 부모들은 더 심하게 항의할 것 같다. 그러나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답변처럼, 아이는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고, 사랑하는 한 명의 사람이다. 내가 어떤 이의 성격을 바꿀 수 없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깽판쳐도 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결국 아이가 이겨낼 싸움이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아이의 행불행의 상당부분을 결정할 수 있는 압도적인 존재다. 부모로서 기본적으로 제공해줘야 하는 것을 해줄 것, 아이가 자신의 기질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줄 수 있는 만큼은 지원해 줄 것, 아이를 인간적으로 존중해 줄 것, 그래서 나와 아이의 '개인적인 관계'가 원만할 수 있도록 가꾸어 나갈 것. 이것만 해도 엄청나게 도전적인 목표이고, 인간 대 인간으로 큰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 외에 무슨 야심찬 인간개조 계획이 필요할까.

개인 양육 지침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저자의 주장은 함의가 매우 크다. 저소득층 가정 어린이의 조기 교육을 지원하는 헤드스타트 운동이 좀처럼 장기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주디스 해리스의 주장이 맞다면 아마 아이를 둘러싼 집 밖 환경을 전반적으로 개선시키는 작업이 병행되지 못한 탓이 클 것이다.

결손 가정의 아이는 제대로 자라기 어려운가? 양육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렇다라고 밖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디스 해리스의 주장이 맞다면 결손 그 자체는 성격 형성의 큰 원인이 되지 못한다. 결손과 자주 함께 따라다니는 다른 문제들 - 편부/편모의 낮은 경제력, 주변 환경, 아이들의 놀림 등이 아이를 또래집단에서 뒤떨어지게 하고 그것이 성격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회가 지원해야 하는 포인트도 바뀐다.

유전자의 영향력을 강조하고 기존의 진보적 교육운동의 한계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주디스 해리스의 주장은 보수적인 면을 띄는 것도 맞다. 특히 좋은 동네에 사는 것이 좋은 아이를 키우는 지름길이라는 암시가 그렇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음 세대의 올바른 성장이 부모 개개인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공교육과 지역사회 환경을 담당하는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는 강력한 논거를 제시한다는 점, 여성이 가정에 묶이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양육의 '심리적인 불안'에서 마음의 짐을 상당 부분 덜어준다는 점에서 저자의 '집단 사회화 발달 이론'은 진보적인 정책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스티븐 핑커는 추천사에서 이 책이 심리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나에게도 졸업하고 읽은 심리학 책 중에서는 가장 신선한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 빨리 번역되어 부모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어려운 육아, 부모들이 아이가 나 때문에 삐뚤게 자라지는 않을까하는 마음의 짐이라도 내려놓길 바란다.

덧글

  • 2011/12/02 11:5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다시다 2011/12/06 10:45 #

    저도 공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주디스 해리스 식이라면, 공교육은 교육자원의 평등한 분배 뿐 아니라 전통적인 또래집단 형성에 거시적인 개입도 필요할 것 같아요.
  • 2011/12/02 12:0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나그네 2016/10/31 14:50 # 삭제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양육가설 번역본이 어느 블로그 혹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번역이 올려져 있다고 언급하신 블로그를 아무리 찾아도 쉽게 찾을수가 없어서요
    꼭 읽고 싶은데....
  • 초록책방 2018/05/10 17:55 # 삭제

    안녕하세요, 나그네님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양육가설 번역본이 지난해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5월 23일 수요일 오전 11시에 양육가설을 번역한 최수근 님의 북토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하시고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bitly.kr/VQ5v
  • 초록책방 2018/05/10 17:54 # 삭제

    안녕하세요, 저는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초록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정현식이라고 합니다. 책 <양육가설>에 대해서 쓰신 내용 잘 읽었습니다.
    다름아니라 후기를 쓰신 <양육가설>책으로 5월 23일 수요일 오전 11시에 주디스리치해리스 의 양육가설을 번역하신 최수근 선생님의 북토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혹시 양육가설에 대한 내용이 더 궁금하시다면 한번 참가해보시는건 어떠신가요?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하시고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bitly.kr/VQ5v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Google Analyctics

<script> (function(i,s,o,g,r,a,m){i['GoogleAnalyticsObject']=r;i[r]=i[r]||function(){ (i[r].q=i[r].q||[]).push(arguments)},i[r].l=1*new Date();a=s.createElement(o), m=s.getElementsByTagName(o)[0];a.async=1;a.src=g;m.parentNode.insertBefore(a,m) })(window,document,'script','//www.google-analytics.com/analytics.js','ga'); ga('create', 'UA-47865871-1', 'egloos.com'); ga('send', 'pageview'); </script>